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번의 난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이후 세월이 흐른 뒤 [[위구르]]나 [[준가르]] 등이 청나라 치하에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에도 이 삼번의 난이 어느 정도 원인제공을 했다는 시각도 있다.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만일 청 황실에서 새 피정복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할 의사가 있었다면 이들이 현실 역사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정도의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 일인데 이미 이 삼번의 난으로 한번 크게 곤혹을 치뤘던 청나라가 무조건적인 중앙집권에 집착하게 되면서 일이 나쁘게 흘러갔다는 것. 다만 이를 반박하는 측에서는 청 황실의 경우는 다른 [[정복왕조]]들과는 달리 이미 [[숭덕제]] 때부터 중앙집권에 대한 의욕을 강하게 드러냈다는 점을 지적하며 따라서 삼번의 난이 없었더라도 청 황실은 여전히 중앙집권을 국시로 삼았을 것이라고 본다.[* 실제로 상술했듯이 삼번의 난의 직접적인 발발 원인은 '''강희제가 먼저''' 철번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서였다.] 고대 [[페르시아 제국]]의 서방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. 기원전 448년 아테네-페르시아 평화조약으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아나톨리아 패권은 재확립되었는데, 76년이 지난 기원전 372년 카파도키아 [[사트라프]] 다타메스가 이집트 토벌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. 뒤이어 기원전 366년 프리기아-헬레스폰트의 사트라프 아리오바르자네스가 헬레스폰트 ([[미시아]]) 영지의 반납을 거부하며 반란에 동참했다. 다만 전자는 사위에게 배신당해 살해당했고, 후자는 아들에게 배신당해 샤한샤에게 보내져 십자가형에 처해졌다. 그 무렵인 기원전 362년, 아르메니아의 사트라프 오론테스가 미시아 영지로 이관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다른 반란 세력이 궤멸되는 것을 보고 항복했고, 샤한샤는 그를 사면한 후 반란을 일으켰던 사트라프들의 영지 일부를 하사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